함경도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던 무속 의례는, 실향민들의 이주와 함께 남한으로 전해지게 됐습니다.
그러나 장소와 삶의 방식이 달라지면서 굿도 점차 변형되었고, 지금은 ‘망향굿’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기억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무속 전통 의례 속에서도 특별한 ‘이동의 굿’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잊히지 않는 뿌리: 함경도 실향민 굿의 존재 이유
1945년 광복과 함께 시작된 남북의 분단은, 수많은 실향민을 남한으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그중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들은 강원도, 경기도 북부, 인천 등지에 정착하면서 고향의 문화와 신앙을 그대로 옮겨오려 했다.
그러나 새로운 땅에는 고향의 산과 물, 제당, 굿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무속 의례의 전제였던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기에 함경도 무속은 실향과 이주의 과정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변형되었다.
그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망향굿’이다. 이 굿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기억 속 고향을 신의 자리로 불러내고, 그곳을 향한 그리움과 안녕을 기원하는 방식으로 성립됐다.
이 글에서는 함경도 굿의 원형과 남한에서의 변형, 그리고 실향민 후손들이 현재 어떤 방식으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 이야기는 단지 실향민의 굿이 아니라, 한국 무속 전통 의례가 어떻게 시대와 공간 속에서 유연하게 적응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함경도 무속의 원형: 강신무 계열의 구조
함경도 무속은 강신무 계열로,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중심이 되는 전통이다.
굿의 형식은 세련된 본풀이 서사, 격렬한 무무(춤), 그리고 장단의 리듬감이 빠르고 정제된 의식 구성이 특징이다.
또한, 사람이 아닌 자연에 깃든 신격이 다수 등장하며, ‘산신’, ‘물신’, ‘기와신’, ‘풍신’ 등 자연과 조상의 혼이 뒤섞인 복합적 신관을 보여준다. 함경도 굿은 조선 후기까지는 두만강 유역의 민속 종합체로 유지되었고, 해방 이전까지도 마을단위 공동체에서 굿은 신과 사람을 잇는 주요 통로였다.
이처럼 함경도 무속은 지역성과 공동체성이 뚜렷한 전통 의례였다.
이주와 분단: 굿터 없는 실향의 시간
해방과 전쟁, 이산과 이주는 함경도 무속에도 거대한 단절을 가져왔다.
가장 큰 문제는 ‘굿터’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무속 의례는 장소에 뿌리내린 신과의 관계 위에서 성립되지만, 실향민들은 고향의 신당과 제당을 떠난 채 낯선 땅에 머물게 되었다.
그 결과 무속인들은 “신은 여전히 따라왔지만, 신의 자리는 없었다”라고 증언한다.
이 시기 굿은 가족 중심, 또는 꿈속에서 만난 신의 지시로 이루어지는 비공식적, 임시적 형태로 자주 바뀌었고, 공동체 단위가 아닌 개인 중심의 신앙으로 위축되기도 했다.
망향굿의 등장: 없는 고향을 불러내는 의례
1950년대 이후,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이 모인 일부 마을에서는 *‘망향굿’*이라는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굿은 본래의 ‘천신굿’, ‘거리굿’, ‘집굿’ 등에서 파생된 것으로, 핵심은 ‘고향을 향해 굿을 올리는 것’이다.
굿판에는 함경도 출신의 신을 초청하고, 실향민들은 신에게 자신과 조상의 안부를 전한다.
의식 중에는 무당이 고향 산천을 부르고, 사람들은 눈을 감고 고향 마을의 제당을 떠올린다.
망향굿은 신과 인간이 함께 기억을 복원하는 의례이며, 실향의 아픔을 공유하는 공동체 의례로 기능한다.
남한에서의 변형: 굿의 절차와 내용의 조정
남한에서 전승된 함경도 굿은 공간과 시대에 맞게 일부 절차와 형식이 변형되었다.
예를 들어,
- 산신 대신 조상신 중심으로 변화,
- 제물도 남한의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 대체,
- 굿터 부족으로 마당이나 문화센터에서 소규모 진행 등이 있다.
무당들은 함경도 본풀이를 그대로 외우지만, 청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어 억양과 표현을 일부 조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굿 속에 남아 있는 함경도식 장단, 무복, 말투, 용어는 여전히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것이 굿의 살아 있는 유연성이다.
전승과 기억: 실향민 2세대의 선택
현재 실향민 1세대는 대부분 고령이거나 이미 고인이 되었고, 2세대와 3세대는 고향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후손들은 굿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자 한다.
문화재단, 실향민 단체, 지역 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함경도 굿 복원 프로젝트’, ‘망향굿 재현 행사’, ‘기록 영상화 작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굿은 단순히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유대의 지속을 위한 현재진행형 행위가 되고 있다.
이것이 굿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 이유다.
실향과 굿: 무속이 기억을 붙잡는 방식
실향민에게 고향은 물리적 장소가 아닌 기억과 정서가 축적된 상징 공간이다.
굿은 바로 이 기억을 소환하고, 그것을 현재에 다시 말하는 방식이다.
망향굿에서 무당이 부르는 신은, 실제로 존재했던 제당의 신이 아니라 그들이 기억 속에서 되살린 집단적 상상 속의 신이다.
이런 굿은 허상이 아니라 기억의 재현이자 문화의 복원이다.
굿이 있기 때문에 실향민들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있고, 그 연결고리를 다음 세대에게 말할 수 있게 된다.
굿은 물리적 장소 없이도 수행될 수 있는 심리적 장소의 형성 방식이다.
이 점에서 함경도 실향민 굿은 ‘공간에 귀속된 무속’이 아닌, ‘기억에 의존하는 무속’으로서 한국 무속 전통 의례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함경도 굿, 사라진 고향을 잇는 무속의 언어
한국 무속 전통 의례는 지역성에 기반하면서도, 시대와 공간의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해 왔다.
함경도 실향민 굿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굿은 장소를 잃었지만, 기억과 의지 속에서 다시 자리 잡았고, 망향이라는 상처를 굿이라는 의례로 봉합하는 기능을 했다.
이 굿은 고향의 재현이자, 실향의 기억을 다음 세대와 공유하려는 문화적 선택이며, 한국 무속이 가진 가장 유연한 생존 방식이다.
사라진 고향이 존재하는 한, 굿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향의 무속’이 오늘날 갖는 존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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